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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10.26 한국교육론(연재글) 2.중국의 역사왜곡

2) 중국의 역사 왜곡


  우리의 역사는 오래전에 한 번 더 왜곡된 사실이 있었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2200년 전 중국을 하나로 통일한 진시황에 의해서 이루어진 분서갱유가 바로 그것이다.


 진시황은 천하를 통일한 후에 왜 모든 역사책을 불태우고, 그것을 알고 있는 모든 학자들을 죽였을까? 앞에서 밝힌 일본의 만행과 너무도 닮아 있다는데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현재 고구려 역사를 중국 역사에 편입하려는 동북공정과도 흡사하다. 이러한 주장을 보면, 유학이 결코 중국의 학문이 아니라 고조선의 학문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진나라가 멸망하고 한 왕조(B.C 206-A.D220)가 일어났다. 지금의 정통 중국 고대사는 결국 한나라 시대의 유학자들에 의해서 다시 씌여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역사책이 불타고 전대의 학자들이 몰살당한 상황에서 역사를 그대로 복원한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두 번의 복원과정을 거치게 된다.


 첫 번째는 한나라 효문제(B.C 179-157)때 황제가 <서경(書經)>이라는 고대 역사서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온 나라를 뒤져서라도 책을 찾도록 했다. 그러다가 진나라의 박사였던 복생이라는 학자가 <서경>이라는 역사책을 잘 알고 있다는 말을 듣고 그를 불렀으나, 그는 이미 구십 노인이라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하였다. 이에 황제가 조착(朝錯)이라는 관리를 파견하여 그 내용을 배워 오게 하였으니 이것이 첫 번째 복원 내역이다. <서경>은 사서삼경의 하나로 역사를 기록한 책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조착이라는 이름을 살펴보면 조(朝)는 조선의 조에 해당하고, 착(錯)은 착란, 왜곡의 뜻이다. 따라서 조착이란 말은 “조선의 역사를 왜곡한 자”라는 뜻이 된다. 최고의 경전이자 역사서를 편찬한 사람의 이름치고는 너무나도 격에 맞지 않는다.


 두 번째는 한나라 경제(B.C 156-141)때의 일이다. 노나라 공왕이 궁전을 넓히기 위해 공자가 살던 옛집을 헐었는데, 벽 속에서 <서경>을 비롯한 공자의 저술 수십 편이 나왔다. 이들은 모두 옛 글자로 씌여진 것이라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는데, 공자의 후손 공안국이 알아보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 당시 조착에 의해서 알려진 29편 보다 16편이 더 많았다고 한다. 이후 한나라 조정에 이를 바쳤는데, 이상하게도 이 책을 사용하지 않다가 3세기 말엽에 가서는 완전히 사라져 지금은 찾을 수가 없다. 학자라면 고서(古書)에 주(註)를 다는 것이 상례인데, 아무도 이 책을 사용하지 않고 주석 한편 전해지지 않는다는 것은 이치에 닿지 않는다. 분명히 고문으로 된 원전에 의거했었고, 그 내용이 이전에 복원된 것보다 풍부함에도 학자들이 사용하기를 꺼린 것은 한나라 조정에 무엇인가 감출 것이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공자의 옛집에서 나온 책들에서 고조선의 역사들이 나왔다면 아마도 그 당시 학자들을 상당히 당황 했을 것이다. 조착에 의해서 편찬된 <서경>이 조작된 것이라는 것을 용납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바로 고조선이 와해되자마자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고, 역사를 말소시키는데 전력을 기울인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상의 글은 윤치원씨의 <부도지>라는 책에서 인용한 것인데, 진신황이 유학서적을 불태우고, 유생들을 생매장 한 것에 대해 공감되는 바가 있어서 소개한 것이다. 일부 학자들은 단순히 진시황이 정권유지 차원에서 반대세력을 제거한 사건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들은 진시황이 한족이 아니고 같은 동이족이었다고 주장하면서 진시황이 같은 동이족의 역사를 말살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한 주장도 아주 설득력이 없지는 않지만 그것만으로는 몇몇 서적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서적들을 불태운 것에 대해서는 설득력이 부족하다. 지금까지 수 세기동안 새로운 집권세력들이 정권유지를 위해서 반대파를 제거하는 일은 있어도 역사서를 포함한 대부분의 서적까지 불태우는 일은 없었다.

 

 따라서 진시황의 분서갱유는 통일 이후에 역사적인 정체성을 이유로 고조선의 역사를 없앤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 또한 한나라 때 역사복원 과정에서 공자의 옛집에서 나온 서적들을 무시한 것은 분명 이것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Posted by 박평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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