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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9.05 가례보감(이순덕 님)

▶ 우리집 가계도

본관

본관

밀양 박씨

규정공파

전주 이씨

효령공파

아버지

어머니

아버지

어머니

박광열

옥 주

이업동

유귀녀

남편의 형제

남편

아내

아내의 형제

1.박영출

2.박영보

3.박 0 0

박영보

이순덕

1.이송곤 5.이태근

2.이송순 6.이승근

3.이행순 7.이양순

4.이순덕 8.이일순

조카

자녀

조카

1.박 0 0

2.박훈진

3.박우엉

4.박주호

5.박우성

6.박숙희

7.박현선

1.박길홍, 유갑남

2.박봉녀, 0 0 0

3.박우진, 이연주

4.박혜선, 정규영

5.박평선, 0  0  0

1) 부모님에 대한 기억

  전북 전주시 서신동에서 살았으며, 아버지 성함은 이업동이고, 어머니 성함은 유귀녀이며, 8형제를 낳아 기르셨다. 아버지께서는 사업수단이 좋으셔서 집은 부유한 편이었다. 큰 아들이 태어나던 해에 돼지고기를 잡수시다가 목에 걸려 갑자기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20여년을 더 사셨으나 가세가 기울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으셨다.

2) 어린 시절 이야기

 나의 어린 시절은 경제적인 여유가 있어서 남부러울 것 없이 성장했다. 그런데 초등학교에 들어가려고만 하면 몸이 아파서 결국 배움의 길로 가지 못했다.

3) 남편과의 만남과 결혼

 내 나이 18살 꽃 다운 나이에 남편을 만나서 결혼을 하게 되었다. 군에 있던 오빠의 상사였던 남편은 어느 날 남편의 가족들을 대동하고 집에 찾아와서 결혼시켜달라고 했고, 아버지께서는 남편의 설득에 넘어가 그만 허락하셨다. 남편과는 12살 차이로 띠 동갑이다. 그 이후로 나이차이가 많아서 힘들었던 때가 많았지만 지프차를 타고 군복을 입고 나타난 남편의 모습이 너무나 멋지고 자랑스러웠다.

4) 시집살이와 분가

 전북 장수군 장계면에 위치한 마을은 밀양박씨 집성촌이었다. 시집에 가서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어렵게 살고 있었으며, 시어버지는 돌아가셨고, 시어머니는 글공부를 많이 해서 기품 있고, 위엄이 있으셨다. 시어머니께서 하신 제일 큰 욕은 “호랑이 지랄한다.”였다. 아무리 화가 나셔도 그 말을 하실 뿐 다른 말이 없으셨다. 나중에 시어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직전에 위급하다는 기별을 듣고 전주에서 우리가 올 때가지 기다렸다가 보시고 눈을 감으셨을 만큼 성품이 곧고 강직하셨다.

 그렇게 1년 반 정도를 살다가 전주 서신동으로 분가를 하게 되었다. 분가할 때 소위 숟가락 하나 달랑 가지고 나왔을 정도로 가난한 시집살이였다. 어떻게든 가난을 이겨내 보려고 죽을힘을 다 써야할 판이었다. 남편은 아버지께서 소개해준 공장에 들어갔지만 얼마 다니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그렇게 몇 번을 거듭하고 나니 아버지께서도 사위를 못마땅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남편은 귀가 엷어 사람들의 이야기를 쉽게 믿고 일을 시작하다 그르치곤 했다. 성품이 착하고 순해서 손해볼일이 있으면 당신이 손해를 보고, 친구를 먼저 챙겨주니 주변에서는 더 없이 좋은 사람이지만 가족들에게는 힘겨운 생활의 연속이었다.

5) 남편이야기

 남편의 성함은 박영보이고, 박건식으로도 불렸으며, 2남 1년 중 둘째이다. 송당 박영선생의 15세손이며, 6.25전쟁 때 받은 무공수훈으로 국가유공자가 되어 남다른 자부심을 가지고 살았다. 특무상사로 전역한 후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가족을 돌보려고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고, 병치레를 많이 해서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임실에서 살 때 섬진강 수몰지역으로 지정되어 전주로 나오게 되었으며, 동네 이장 일을 보면서 세상 물정에 눈을 뜨게 되었다.

지금 남편은 87세 나이로 8년째 병상에 누워 있다. 한 평생을 같이 살면서 다투기도 했고, 헤어지려고도 했고, 죽고 싶은 적도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착한 남편이 불쌍하게만 여겨지는 것을 보면 천생연분이 틀림없다. 그래도 어려울 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고, 기쁠 때 함께 있어준 것만으로도 감사할 뿐이다.

6) 자녀들과 손자들

첫째는 박길홍이며, 며느리는 유갑남이고, 손자로 박만준, 박기준이 있다. 큰아들은 전주시 강남골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고생을 많이 했다. 남편이 주로 밖으로 돌아다녔기 때문에 장남이 어릴 때부터 가장노릇을 해야 했다. 큰아들에 대해서 가장 행복했던 기억은 고등학교 다닐 때 수학영행을 간다고 하기에 새 옷을 사서 입혀 보냈을 때와 사업에 성공하여 공장을 크게 지어 이전식을 할 때이며, 가장 걱정했던 기억은 군대 갔을 때이다.

둘째는 박봉녀이며, 손녀로 이진선이 있다. 전북 완주군 봉동에서 태어났다고 이름에도 “봉”자를 넣어 남편이 지었다. 첫째아들과 마찬가지로 7살 때부터 혼자서 가족들의 밥을 지어야 했을 만큼 어릴 때부터 고생을 만이 했으며, 밤이 늦도록 밖에서 일을 해야 할 때가 많았기 때문에 일찍부터 어머니 노릇을 해야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린 나이에 가사 일을 담당했던 것이 참으로 대견스럽고 한편으로는 미안하기도 하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소식도 없이 집을 나갔다 돌아 왔을 때, 종교에 빠져 재산을 탕진하고 마침내 이혼까지 했을 때 가장 많이 걱정을 했다. 그래도 모든 것을 뒤로 하고 큰아들 공장에 들어가서 다시금 경제력도 회복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 살고 있으니 다행이고 감사할 뿐이다.

셋째는 박우진이며, 며느리는 이연주이고, 손자로 박태준, 박태연이 있다. 작은 아들은 임실군 월면리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독립심이 강했다. 들째 아들에 대해 제일 행복했던 순간은 대학교 졸업식 때이며, 가장 걱정했던 기억은 군대 갔을 때이다. 한창 사회적으로 민주화운동이 극렬할 때였다.

넷째는 박혜선이며, 사위는 정규영이고, 손자로 정준헌, 정종헌이 있다. 전북 임실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성격이 좋아 사람들과 잘 사귀고, 이웃집 아이를 봐주고 선물을 받아오기도 하고, 커서는 간호보조사로 일을 하면서 남을 도와주는 일을 하면서 컸다. 그래서 지금도 8년째 병상에 있는 남편을 돌보고 있다. 넷째에 대해서 가장 걱정했던 기억은 간호보조사로 일하다가 전남 진도로 발령받아 갔을 때이다.

다섯째는 박평선이다. 역시 전북 임실에서 태어났으며, 형제들 중에서 가장 복을 많이 받고 태어났다. 경제력이 어느 정도 있을 때 어린 시절을 보냈고, 대학에 입학 했을 때 남편이 국가유공자가 되는 바람에 등록금을 면제 받았고, 형제들은 가난해서 제대로 공부를 할 수 없었는데, 다섯째는 대학원 박사과정까지 마쳤으니 복이 많은 셈이다. 가장 행복했던 기억은 장교로 임관했을 때이고, 가장 걱정했던 기억은 최근까지 결혼도 안하고, 사회운동을 한답시고, 가족도 멀리하고 돌아다니는 것을 보면 마음이 아프고, 걱정이 많다. 저러다가 부모가 다 죽고 나면 성공도 못하고 형제들과도 멀어지면 외톨이가 될까봐 걱정이 태산이다.

▶ 우리 가족의 진품 명품

1. 가훈

형제간에 우애 있게 살아가는 것과 게으름 피우지 말고 부지런히 일해서 남보란 듯이 살아갈 것이다.

2. 좌우명

남 못 할일 안 시키고, 옳다고 믿는 내 소견대로 중심을 가지고 살아간다.

3. 사진

<남편 박영보와 함께 직은 사진>


 

                                                    <결혼식 사진>

 

                                                               <친정 어머니>



                                                       <시어머니>

▶ 가족박물관, 전시장

송당(松堂)박영[朴英]

<박영의 글씨, <근묵>에서, 성균관대학교 도서관 소장 / 송당 정사 >

1471(성종 2)~1540(중종 35). 조선 중종 때의 주자학자. 본관은 밀양. 자는 자실(子實), 호는 송당(松堂). 아버지는 이조참판 수종(壽宗)이며, 어머니는 양녕대군(讓寧大君)의 딸이다. 무예에 뛰어나 1491(성종 22) 원수(元帥) 이극균(李克均)을 따라 건주위(建州衛) 정벌에 참여했다. 이듬해 9월 무과에 합격해 선전관이 되었다. 무인으로서 유식한 군자가 되지 못함을 한탄하다가 성종이 죽자 고향으로 돌아가 정붕(鄭鵬)의 문하에서 〈대학〉등의 경전을 배웠다.

1506년 중종반정 후에는 조방장(助防將)을 거쳐 강계부사·의주목사·동부승지·내의원제조 등을 거쳤다. 1519년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옴으로써 기묘사화를 모면하고, 다음해 영남좌절도사가 되었다. 학문은 정붕의 영향을 받아 김굉필의 학통을 이었고, 천문·지리·성명(性命)·산수 등에 박학했다. 또한 의술에도 뛰어나 〈경험방 經驗方〉·〈활인신방 活人新方〉 등을 저술했다.

 문하에서 이황(李滉)·박운(朴雲)·김취성(金就成)·김취문(金就文)·신계성(申季誠)·박소(朴紹) 등이 배출되었다. 저서에 〈백록동규해 白鹿洞規解〉·〈송당집〉 등이 있다. 황간 송계서원(松溪書院), 선산 금오서원(金烏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계구(戒口)

입이란 것은 화와 복이 나오는 문이니, 삼가지 않을 수 없다. 다른 사람과 더불어 모여서 이야기 할 때는 다만 강산과 풍월과 시(詩)와 옛날 현인들의 경계할만한 이야기나, 후세에서 본받을 만한 일을 말할 뿐이고, 국가의 정치나 인간의 명예에 대해서는 입에서 내지 말도록 삼갈 것이다.


▶ 인생 역전이야기

1. 임실에서 전주까지 50리길을 걸어서 장을 보다.

인생을 살다보면 여러 가지 우여곡절을 겪게 마련인데, 특별히 힘들고 어려운 기억이 있다면 임실에서 빨을 만들어 팔던 때일 것이다. 밀가루를 사기 위해 임실에서 전주까지 50리 길을 걸어서 갔다 와야 했는데, 아침 일찍 출발하면 오후에 도착하는데, 밀가루를 사가지고 다시 부랴부랴 돌아오면 어둑어둑해지는 저녁이 된다. 여자의 몸으로 홀로 50리길 전주를 오가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전주로 이사를 올 때까지 10년 동안 일주일에 3,4번을 반복해야 했다. 오로지 자식들을 굶기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어느 때에는 강가에서 잡은 대수리를 전주에 가서 팔아오는 일도 했다. 그 덕분에 남편은 동네 이장 일을 볼 수 있었고, 자식들은 못된 곳에 빠지지 않고 착하게 잘 자라주었다고 생각한다.

2. 임실에서 전주 용정마을로 이사 오는 꿈 이야기

섬진강 수몰지역으로 지정되어 임실을 떠나던 날 새로 이사 갈 집을 갔는데, 많은 꿀벌들이 집으로 따라와 꿀통에 꿀을 가득 담아두는 꿈을 꾸었다. 신기하기도 해서 마음속으로 새로 이사 갈 집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가지고 와보니 정말 꿈에서 본 그대로였다. 집으로 들어가는 입구하며, 마당이며, 집 구조가 꿈에서 본 그대로였다. 그런 집에서 40여년을 살았고, 남편이 아프면서 아들 곁으로 올라오면서 기도원으로 활용하고 싶어 하는 분이 있어서 임대를 주었다가 얼마 전에 모두 정리하고 용정마을을 떠나왔다. 그리고 그 집은 이제는 기도원이 되어 있다.

3. 하나님과의 만남

시댁은 전통적인 유교 집안이었고, 부모님은 불교 집안이었다. 그래서 최근까지만 해도 기독교에 대해서는 멀게만 느꼈었다. 그런데 남편이 파킨슨병으로 병상에서 생활한지 3년 만에 우연한 기회로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다. 고독한 투병생활을 가족들 모두를 지치고 힘들게 했고, 점점 자식들과의 관계도 불편해지기 시작할 때 인연이 된 목사님의 관심과 배려로 하나님께 인도되었고, 아침저녁으로 올린 수많은 눈물의 기도에 응답하셨는지 마음의 평온을 얻게 되었다. 사실 남편은 기독교를 무척이나 배척했었다. 전쟁 중에 부하들을 많이 잃었던 것이 목사님들의 기도 때문이라고 믿고 계셨다. 왜냐하면 기도만 하고 작전을 수행하면 곡 실패를 하셨단다. 그런데 이번에 몸이 아프고 나서부터는 같이 교회도 나가고, 찬송가도 부른다. 이제는 몸도 가누기 어려워 그럴 수 없지만 돌아가시기 전에 하나님을 만난 것이 우리 부부의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 가족의 소망과 후손들에게 남기는 편지

남편이 어이들을 모아놓고 항상 하는 말이 있다. “항상 마음의 중심을 가지고 살아라.” 어디를 가든 마음에 중심을 잃지 말고 살라고 하셨다. 내가 고생하면서 터득한 지혜라면 “남 못 할일 안 시키고, 내 소견대로 옳다고 믿는 것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부부가 자녀들에게 원하는 것이 있다면 “모두 건강하고, 형제들 간에 우애 있게 살아가는 것이다.” 누가 잘 산다고 못사는 형제를 무시하거나 외면하지 말고, 서로 돕고 살아갈 것이며, 못 산다고 밖으로만 돌지 말고 형제들과 상의해서 더불어 살길을 모색하길 바랄 뿐이다. 가난하게 살았던 시절을 생각해서 조금이라도 나누고 베푸는 삶을 살아가길 바란다. <끝>

Posted by 박평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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