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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10.02 가례보감(박상민 님)

가례보감(박상민 님)

▶ 우리가족(親家圖) 4대 가계도

친가(親家)

祖父 朴鍾和

祖母 林榮和

伯叔 朴在炯

伯母 沈준화

伯叔 朴在福

伯母 安종명

伯叔 朴在一

伯母 李문희

父親 朴在春

姑母 朴在淑

姑母夫 金宣仲

母親 劉基香

外叔 劉基邦

叔母 羅泰善

外叔 劉基天

叔母 辛永嬉

外叔 劉基黃

叔母 金貞福

外叔 劉基成

叔母 方楊禮

泰恒, 泰淑

泰實, 泰玉

泰任, 泰權

泰實, 泰嬉

泰一, 泰成

泰鶴, 泰鎬

泰美

泰慶, 泰天

兄 朴京敏

嫂 尹亨淑

本人 朴尙敏

夫 柳惠善

子 朴泫男

子 朴泫祐

외가(外家)

1外從祖父

劉 敦

2 外從祖父

劉 炯

3 外從祖父

劉 錫

4

外祖父 劉 甲

外祖母 金 五 得

(安東金氏)

2 겐 이

아버지

3 균 이

아버지

4 운 교

아버지

5 혜 교

아버지

6 소 애

아버지

7 종 애

아버지

쌍둥이모

아버지

父 朴在春

母 劉基香

本 朴尙敏

夫 柳惠善

兄 朴京敏

嫂 尹亨淑

朴 泫 祐

朴 泫 男

<할아버지와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

할아버지는 월탄 박종화선생이시며, 공식적으로 알려진 것 외에는 손자라고 해서 특별히 아는 바는 없다. 다만 조부가 아버지를 거의 돌보지 않았고, 아버지도 조부께 아주 작은 것이라도 의지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할머니께서 해방이 되기 10년 전 막내아들인 아버지와 어린 딸인 고모의 손을 잡고 약 보름동안 춘천을 거쳐 서울 돈암정으로 오셨다고 한다. 할머니께서는 슬하에 4남 1녀를 두셨는데 그 중 첫째 백숙께서 어머니가 막내, 여동생을 동행하고 서울로 향하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곧바로 채비를 갖추어 어머니의 뒤를 따랐으나 이것이 휴전선이 가로막혀 반백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형제는 물론 모친상봉 조차 못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춘천(당시에는 춘성군)까지 와서 50여년이 넘게 모친과 동생들의 소식을 모르고 홀로 지내야만 했던 백숙께서는 얼마나 외로움 속에서 큰 고통을 당하셨을 것이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외가 이야기>

외할머니의 성함은 김오득이다. 고향은 평안북도 박천군 양가면 연담리이다. 전통적으로 불교를 깊게 섬겨온 집안이다. 대대로 불교 집안이었던 외할머니께서는 고향 평북 박천군 묘향산에 100개가 넘는 절을 지었다고 한다. “여자를 가까이 하지 말라. 절대 음주와 흡연을 하지 말라.”는 가명(家名)이 엄격히 지켜져 내려왔고, 이를 어기면 파문을 당하는 것도 각오해야 할 정도로 이 규율은 매우 엄격했다고 한다. 형제들은 어려서 돌아가신 분까지 무려 12명이나 되고, 그중에는 쌍둥이 이모도 계셨다고 한다. 외할머니께서는 강릉 유가 집안으로 시집을 가셨고, 그 이후부터 유씨 집안이 매우 번성했다고 한다. 외할머니께서는 넉넉한 재력으로 친정 동생들의 뒷바라지를 도맡아 해주셨다고 한다.

특히 제일 머리가 뛰어나셨던 김섭 할아버지는 외할머니의 도움으로 혈혈단신 9세의 어린나이로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법학을 전공하여 제1회 조선 변호사 시험에서 수석합격의 영예를 안고 돌아와 미 군정청 시절 법무 담당관(당시 법무장관격)을 지냈으며, 그 유명한 혜화동 로터리 여운형 암살사건을 맡아 처리하신 분이기도 하다.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

아버지는 강원도 철원고지 전투에서 화랑 수성 무공훈장과 은성 무공훈장 2기와 황해도 개성 송악리 전투와 지리산 공비토벌대에서 충무금성 무공훈장 1기를 수여 받으신 6.25전쟁 영웅이셨다. 또한 아버지는 제대 후에 서울 외국어 대학교와 종로 I L I 외국어 학원(국제언어 연구원) 일본어를 가르치시면서 20여 년 동안 연구원을 경영하셨다. 그리고 학원을 그만둔 이후로도 생을 마칠 때까지 계속해서 일본어 보급 및 제자 양육 사업에 힘썼다.

아버지께서는 학교 강의 중 두 차례나 뇌경색 뇌출혈로 의식을 잃고 쓰러지면서도 자신이 건강을 회복해야만 목적을 이룰 수 있다는 일념으로 반신불구가 된 몸을 일으켜 인내와 용기를 가지고 병세를 극복하고 스스로 노력하여 건강을 되찾기도 하셨다. 병마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으로 매일아침 새벽에 움직이기도 힘든 몸을 일으켜 세워 어눌한 자세로 맨손체조를 십 여분씩 반복하시면서 거의 1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새벽에 움직여준 결과 어눌했던 말씨가 돌아오고 반쪽(우측)밖에 쓰지 못했던 몸이 정상적으로 회복되었다. 두 차례의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일본어 회화의 첫걸음>과 <정통 일본어 회화 교본> 등을 저술하기도 하셨다.

아버지께서는 젊은 시절 숙부를 따라 함경남도 흥남공업단지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는데 여기서 함경도 흥남지역의 공업화에 매료되어 기계기술만이 살길이라고 여겼던 때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숙부와 함께 그곳에서 당시 함경도지역 최고 공업대학 격인 흥남공대를 지원하여 아깝게 차석 입학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최고 학부인 와세다 공대 기계과를 다녔지만 잠시 모국에 들어오게 된 시기에 6.25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게 되어 다시는 동경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많은 친척 지인들이 전쟁의 참화 속에서 처참히 죽어가는 모습을 직접 보시고 군에 입대하였다고 한다. 제대 후에도 장기 복무 군인에게 나눠주는 벼 두어 섬 정도로는 생업을 영위하기 힘들었다고 하셨다.

그래서 전역 후 유기황 외삼촌을 따라 서울 영등포에 세워진 경성방직과 (지금의 경방재단) 무궁화 빨래 비누를 생산하던 애경유지 공업사에 취업하셨으며, 최연소의 기계부 부장 그리고 숙부인 유기황은 최단기간으로 공장장직에 오른 주요 핵심인물이 되었다고 했다. 60년경 애경유지공업이 세금문제와 관련해서 큰 물의가 빗어 졌을 때 공장장 신분이었던 외삼촌이 퇴사를 강행하자 아버지 역시 퇴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고 한다.

이후 세 번째 뇌출혈은 아버지로 하여금 건강에 대한 의지를 꺾어 놓았고 정신까지 약하게 만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왜냐하면 세 번째 뇌출혈은 평소에 위궤양 또는 위염 인줄로만 알고 보편적인 처방에만 의존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뇌출혈과 함께 위 천공이 되어 구강을 통해 과다출혈로 나타나게 되자 보통 사람의 의지로는 그 고통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역부족이었고, 이는 참을 수 없는 큰 고통이 수반되는 것이었기에 주위에서는 더 이상 살 수 없다고 판단했는데, 마침내 그 고통을 이기고 위 천공과 세 번째 뇌출혈을 어떠한 전문적인 치료 없이 이겨냈고 건강을 또 다시 회복했다. 그리고 말년까지 건강한 모습으로 산행을 즐기며, 무거운 물통(20리터) 두 개를 양 어깨에 메고 산을 다니셨다. 그런데 이처럼 큰 병마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잘 견디어 오다 1997년 3월 1일 삼일절 정부초청 인사로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기념식에 참석하고 돌아온 이후 잠시 잠을 청하고는 영영 일어나지 못하셨다.

어머니께서는 서울 영등포에서 꽤나 크게 편물업에 종사하셨다. 어려서부터 손재주와 눈썰미가 있으셔서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전공분야(체육학 테니스전공: 일명 정구)를 살려 운동구점과 수예점을 동시 운영 하셨다. 전공분야 운동구점은 시세가 없었지만 부수적으로 배운 일명 옷가게.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없지만 예전에는 편물(수편 또는 양판이라 칭함)점이 한참 유행하던 때가 있었다. 가는 털실류를 가지고 의류를 생산(기계에 의한 뜨개질)하는 업체로 영등포에 여러 개 점포를 가지고 있었던 처녀 대상(大商)이셨다. 젊은 여자의 몸으로 이렇게 여러 개 점포를 운영하자면 주위로부터 오는 어려움이 많았지만 건달생활을 하던 남동생이 있었기에 가능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영등포를 돌면서 건달생활을 하던 외숙부 유기천는 그 후 호랑이 같이 무서운 외할머니 덕택에 육군 사관학교 8기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리고 중령계급으로 6.25 동란 시 이북 평양에 최초 입성을 한 군부 대대장이 되었으며, 수원시장과 강원부지사를 거쳐 제주도부지사 산림청 부청장과 이북 5도청 지사를 마지막으로 공직에서 나와 13대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재직 시 가벼운 신병치료차 경희의료원에 입원한 것이 불귀에 객이 되어 인생에 모든 것을 놓아 버린 사람이 되었다.

<나의 인생이야기>

나는 경북 군위 박씨 신라 경명왕의 셋째아들 속함대군 박언신의 15대손 박헌(박혁거세의 29세손) 절충공파 56대손이다. 1962년 12월 20일, 소한 추위가 매섭게 몰아치고 있던 새벽녘에 나는 태어났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대들기와 따지기를 좋아했으며, 평범하지 않는 삶의 연속이었다. 남들에게 대들고 지기 싫어한 나머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일이년 사이에 무려 중학교와 고등학교 과정을 검정고시를 통해 월반하고, 대학문을 두드렸지만 보기 좋게 두 번 실패를 거듭한 나머지 실의에 빠졌을 때 구세주처럼 나타난 어린 시절 은사님 권순찬 교수(구 영등포 학원 이사장이자 아버지의 친구)의 도움으로 재기에 성공했다.

당시 예비고사 성적으로는 사립 일류대학 학과 지원이 가능했지만 실패의 두려움과 또 한편으로는 검정고시생 출신이라는 본고사 핸디캡이 작용했던지라 해공 신익희 선생이 세우신 국민대 4년 장학생의 길을 택했다. 졸업과 동시에 미국 L A 알타로마 대학 과정 중에 군 입대로 이어졌고, 미군 극동함대 소속 G I로 한국근무와 캘리포니아 44(fortyfour) 엔지니어링 버탤런에서 근무한 경력을 살려 귀국 후에는 잠시 노량진 제일외국어 학원과 여의도 재경외국어 학원에서 강사로 활동했으며, 이후 세계일보와 경향신문사 월간 부동산 본사를 거쳐 언론사 시절 우연히 길에서 만난 어릴 적 친구의 도움으로 머니캠프라는 보석유통 회사를 창업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인생극장>

아버지와 친구의 죽음으로 슬픔이 머문 경험이 사라지기도 전에 일생일대의 최고 시련이 다가왔으니 이것이 바로 자신의 죽음(임사체험)이었다.

2001년 8월11일, 이날은 한창 더위가 가시질 않았고 부산 해운대 지역에는 연일 최고의 피서 인파가 북적이는 광경이 주요기사로 채워지곤 하던 시절이었다. 세계일보 재직시절부터 가끔씩은 가슴속이 멍해지긴 했어도 별거 아니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고, 조금 쉬어가면 다시 멀쩡하게 편해지고 하는 것으로 보아 그럴 수 도 있겠거니 하는 생각으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다. 아주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가슴 통증이 이날은 유별나게 참을 수 없는 고통으로 전해졌고 급기야는 화장실에서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지고 말았던 것이다. 화장실에 들어간 사람이 나오질 않자 급히 문을 열었으나 이미 사람은 혼수상태로 죽어가고 있었다. 급히 달려온 응급차에 실렸지만 이미 숨이 멎은 상태였고, 응급차에 실린 산소포화도는 70%이하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때 마침 병원마다 의약분업이다 해서 파업이 지속되고 있어서 가까운 곳도 아닌 신길동 성애병원까지 실려 왔다. 성애병원만이 파업에서 제외된 유일한 천주교 재단이어서 가능했다고 했지만 거리상으로도 이미 15분에서 20여분이 훨씬 지난 상태였다. 어머니는 정신이 없어 신발도 신지 못하고 맨발로 따라온 상황이었다.

이후 휴가철 피서지로 향했던 가족들이 달려오고 주위에 친척들은 매우 슬픈 마음으로 하나 둘 씩 모여 이미 사망판정을 받은 나에게 조의를 표하며 장례를 의논하고 있는데, 응급실의 수간호사는 살 수 있는 확률은 거의 없었지만 해보는 데 까지는 다 해보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확실한 병명조차 불분명한 상태에서 단지 과다 마약 투여로 인한 심장마비사라는 얼토당토않은 이야기가 전해졌다. 환자가 가족들 모르게 마약을 소지 투여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판단한 여의사의 확진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어찌 되었던 우선 살려 놓고 보자는 심정으로 회생치료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세포 전체가 죽고 검게 썩은 모습을 하고 있었으니, 의사도 가족들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시신의 겉모습으로는 마약류 환자가 보이는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는 게 매우 설득력이 있었지만 유독 나의 행실을 잘 알고 있었던 형님만이 믿을 수 없는 일이라며 반대주장을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마약이든 신경계 뇌염이든 병원에서 내린 처방에 불복하고 시신을 부검해서 라도 사인을 꼭 밝혀내고 말겠다고 경찰서로 연락을 취하던 중 형님께서는 응급실을 나오는 동생의 모습이 흰 가운을 씌워지지 않았다는 것에서 죽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었다고 했다.

이후 중환자실 옆 사망예정자 대기실 같은 곳으로 옮겨져 만 3일 만에 의식을 차렸지만 썩을 대로 썩은 몸이 제 모습으로 갖추어져 돌아오는 데 한 달이 넘는 시간을 버텨내야 했고, 사망예정자 대기실에서 이스라엘 조상의 아버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방문을 받는 기현상을 겪게 되었다. 중환자실 옆 사망예정자 대기실은 중환자실 간호원, 의사 그리고 환자의 가족 한명만이 시간출입이 가능했다. 수액에 의존하며 며칠 째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있던 환자 곁 주의로 이들이 나타나 병실이 떠나가듯이 찬송과 기도로 주위를 시끄럽게 하고 홀연히 사라졌으나, 이 광경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고 단지 중환자인 나와 늦은 시간 옆을 지키던 어머니뿐이었다. 이들이 부른 찬송과 기도도 한국어도 영어도 아닌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이었고, 더군다나 환자를 향해 덮어놓고 힘차게 때리기 시작했다. 여러 명의 이스라엘 방문자들로 부터 늘씬하게 실컷 얻어맞았지만 오히려 아픈 곳이 사라지기 시작하면서 며칠을 아무것도 먹지 못하던 몸에 힘이 뻗쳐 생기가 돌아와 즉시 침상에서 벌떡 일어난 것이다.

이렇게 기이한 현상을 경험케 하는 그들을 향해 손을 내저었지만 이미 그들은 할 일을 다 한 듯 병실을 지나 복도 끝에서 아무에게도 자신들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은 채 홀연히 사라지고 말았다. 허기에 지친 몸은 이때부터 입으로 음식이 들어가기 시작했고 곁에서 대 소변을 받아내야만 했던 오물이 차자 그 색깔이 원래의 모습을 갖춰가기 시작한 것이다. (할렐루야!)

곁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았던 환자들과 의사들 모두 한 결 같이 놀라는 표정이었고 병원 측에서는 이런 기적 같은 현상이 주위에서 일어날 줄은 전혀 뜻밖이라 예상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온 이후 두 달 만에 병원을 나왔으나 이내 병세는 호전되지 않았고, 또 다시 가슴통증이 시작되곤 했다.

주위에 약사 친구를 통해서 알아본 결과 병원에서 나올 때 처방 받았던 약들이 모두 신경 정신과 계통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로는 엉터리 의사에 대한 복수의 일념으로 중년의 여의사를 만나서 죽여 없애 버리겠다는 생각까지 했다.

한번 죽었었고 또 죽기를 각오한지라 무엇인 들 못하겠냐는 식이었지만 복수의 일념을 바꾸게 하는 사건이 벌어지고 말았다. 복수를 하기에 최대한 완벽하고 아주 적당한 시간 장소 방법을 택하여 중년의 여의사를 기다리던 중 겨울을 예고하는 비가 축축히 내리기 시작했는데 두 뺨을 스치는 차가운 겨울비는 자신이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증거가 되기에 충분했고 지면을 통해 구두를 뚫고 지나 발끝으로 전해지는 땅의 감촉이 만물의 생동감을 고스란히 전해 느끼게 해 주었다.

내 뇌리를 스치는 생존감... 살아 숨 쉬는 현실감이 느껴지면서 “내가 살아있는 데 왜 저를 죽여야 하는가?” 하는 반감이 처음으로 생기기 시작했고, 어찌되었던 얼마간의 시간이 무의미하게 과거로 돌아갔을 뿐 현재 내게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이 느껴졌다.

나이 많은 어머니.. 멀리서 응원하는 아내... 귀엽고 깜찍한 자식... 돈 많고 의리 있는 친구들... 우애 깊은 형.... 언제나 친절한 사촌들...무엇하나 모자랄 것이 없는 내가 목숨을 부지시켜 살려준 은혜를 갚아야 할 의사에게 복수를 위해 그를 죽여서 또 다른 그의 주변 사람들을 슬프게 만들 수 있는 장본인이 되려 하고 있는 불쌍한 영혼의 모습이 스쳐 지나간 것이다.

두 뺨을 타고 흐르는 시원한 초겨울 빗줄기는 “이것이 네가 살아있는 모습이다.” 라고 눈물로 말해주는 것 같았다. 마약 심장마비, 뇌신경 손상, 뇌염 등으로 여러 차례 원인을 번복했던 중년 돌팔이 여의사에 대한 증오가 사라지면서 오히려 목숨을 구해준 생명의 은인에 대한 존경심이 생긴 것은 차가운 비 때문이 아니고, 만물을 통해 스스로 존재감의 이치를 깨닫게 해준 신의 섭리였던 것이다.

미천하게 여겨왔던 자신에게도 신의 섭리가 있고, 그 섭리 속에 진행되어 온 계획안에 존재하는 자들에 대한 구원섭리의 범주가 있었고, 그 안에 나와 또 그들(의사 가족 친지들)이 있음이 분명하게 느껴졌다. 이 섭리 역사의 계획 속에 있는 인간이라면 생명에 관한 한 그 결정 권한이 설령 신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생사로 다루어져서는 안 된다는 결론이었다.

몇 달 전 심장마비를 겪게 한 병인이 심혈관 질환에 의한 협심증으로 밝혀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새롭게 마음을 고쳐먹은 나를 향한 주님의 은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아 성애병원에서 처방된 약이 모두 불타 없어지는 묘한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무렵 친구가 거액을 투자하고 도와준 보석 유통업은 그야말로 날개를 단 듯 호황을 누리기 시작했고 온라인 보석 방은 재물을 쏟아 부어주는 무형의 보물창고가 되기에 충분했지만, 전기 누전으로 인한 사고가 일어나 사무실이 반소되는 과정에서 받아 놓았던 처방약이 모두 불에 소실되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수일을 복용하여도 낳지 않는 처방약은 불필요 했던 터였고 더군다나 내 자신은 분명 마약환자가 아니었기에 불타 없어진 처방약에 대한 미련은 조금도 없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치료가 시급했던 것이 사실이었고 병인을 알기 위해서 열군데도 넘는 병원을 찾아 다녔지만 심혈관계 질환 중 협심증이라는 정확한 소견을 내 놓은 곳은 부천 소사동에 위치한 세종병원뿐이었다. 부천 소사는 영등포에서 태어난 지 하루 만에 신생아인 내가 옮겨져 여러 해를 보낸 곳이기도 했다.

복숭아 농사를 원했던 어머니에게 외가의 도움의 손길이 뻗쳐 앞에서 언급한 김 섭 할아버지께서 토지로 도와준 곳이 부천 소사동 이였던 것이다. 정확히 경기도 부천군 소사면 조종리 290번지 일대(지금의 소명 여 중교 자리)가 그곳이다.

사람이 죽을 때에는 본향으로 되돌아간다고 했던가? 갑자기 죽음이 엄습해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드디어 마지막 막판심경을 갖게 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세종병원에서는 심장수술을 해야 한다는 끔직한 결과가 나왔다. 심장 조형술 이었지만 처음 수술을 대하는 나로서는 조형술이 무엇인지 정확한 정보가 없었기에 심장 수술로만 여겼던 것이다. 드디어 맨 정신으로 죽음이 기정사실화 되어지는 삭막한 심정으로 조형술에 임했고 불안한 심정은 그치질 않고 의지할 곳이 오직 하나님밖에는 없음이 깨달아 졌다.

시술 전날 꿈속에서 마저 환자가 뒤바뀌는 운명 속에 자신이 죽는 모습이 떠올라 극도로 불안한 심리 속에 시술이 진행되었다. 20여분 진행된 시술 결과는 매우 좋았다. 회복되는 동안 내 자신은 단 한번이라도 남을 위해 시선을 두지 않았고, 오직 너무도 이기적이었고, 혼자만 알았던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순간 갑자기 성애병원에서 회복을 가져다준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도 언어들이 생각났다. 제바흐!!..... 예바흐!!.....

무엇인지도 모른 채 기억 속 저편에 아물어져 가는 상처처럼 여운을 남기는 듯 한 이 말의 뜻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신앙을 단지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라고 여기면서도 실제로는 또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이중적인 나의 몸 뚱아리에 대고 외친 제바흐... 예바흐... 제바흐... 예바흐... (

Posted by 박평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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