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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11.05 3) 단군관련 역사서의 재인식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유학자들이 단군의 역사를 말살했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들이 일제가 우리민족의 뿌리를 없애기 위해서 만들어낸

식민사관인 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삼국시대나 고려시대는 물론이고 조선시대만 해도

왕들에 의해서 혹은 유학자들에 의해서 단군관련 서적들이 보존되어 왔다.

 

간혹 부정적인 시기도 없지 않았겠지만 전체적인 흐름은

조선이라는 국호에서 보듯이 조선은 결코

고대사에 대한 역사를 소홀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국가에서 단군관련 역사서를 수집한 것이

오히려 단군역사 말살정책의 일환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이것 또한 식민사관이 아닌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송호수 교수의 단군관련 역사서 목록 >


가. 상고, 삼국시대
<신지비사>, <해동비록>, <신지비사역술>은 AD1412 년경(조선 태종 12년경)에 소각되었다.

나. 발해시대
<단기고사>는 1959년에 복간되어 전해지고 있으며, 1968년에 윤치도씨에 의해서민족정사로 계승하고 있다.

다. 통일신라시대
<제왕연대력>은 AD 890년경에 고운 최치원이 저술하였으며, 삼국유사보다 약 390년 전에 쓰여진 것으로 1929년에 필사본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한 1957년 박장현씨의 <해동춘추>로 계승하여 전하고 있다.

라. 고려시대
(1) 초 중엽
<조대기>는 AD 926년 발해 멸망 시 대광현 등 유민들이 고려에 망명귀화 할 때 가지고 온 고조선 역대실기로 삼국유사보다 약 350년 전에 쓰여졌던 것을 일제 때 압수, 소각되었다. 그러나 고려말엽 <진역유기>로 계승되어 조선말엽 <규원사화>로 이어지고 있다.

특히 조대기 계승 사서들로는 고려중엽에 <삼성기>로 전해졌으나 일제 때 압수 소각되었다. 그러나 1911년에 계연수의 <환단고기>로 계승되고 있다.
이 외에도 저자미상의 도가사서들, 즉 <고조선 비기>, <삼성밀기>, <지송기>, <삼한합유기>, <신선전> 등이 일제 때 압수 소각되었으나, 조선말엽 <규원사화(단군실사)>로 계승되었다.

(2) 고려 말엽
삼국유사와 거의 같은 시기에 청평도사 이명이 저술한 <진역유기(3권)>은 일제 때 압수 소각되었고, AD1283년경 고려 충렬왕 9년경 이암이 저술한 <단군세기>는 일제 때 압수 소각되었으나, 1911년 계연수의 <환단고기>로 계승되고 있다.

마. 조선시대
AD 1675년 조선 숙종 원년 3월 상순 북애자가 저술한 <규원사화 (단군실사)>는  도가사서 중 최고의 것으로 필사본이 현존하고 있다. 그리고 <동사서>는 고려시대 <조대기> 및 앞서 언급한 도가사서들을 인용하여 <신단실기>등으로 계승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고대관련 역사서 목록>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기록을 보면 조선의 왕들은 국가차원에서 고대사 관련 역사서를 수집하기 위하여 "수거령"을 내리고, 그에 관한 목록을 기록해두고 있다.

<세조 3년 5월 26일(무자)> 팔도관찰사(八道觀察使)에게 유시(諭示)하기를,
고조선비사(古朝鮮秘詞), 대변설(大辯說), 조대기(朝代記), 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  지공기(誌公記), 표훈삼성밀기(表訓三聖密記), 안함 노원 동중 삼성기(安含老元董仲三聖記), 도증기 지리성모 하사량훈(道證記智異聖母河沙良訓), 문태산(文泰山)·왕거인(王居人)·설업(薛業) 등 삼인 기록(三人記錄), 수찬기소(修撰企所)의 1백여 권(卷)과 동천록(動天錄), 마슬록(磨쳗錄), 통천록(通天錄), 호중록(壺中錄), 지화록(地華錄), 도선한도참기(道詵漢都讖記) 등의 문서(文書)는 마땅히 사처(私處)에 간직해서는 안 되니, 만약 간직한 사람이 있으면 진상(進上)하도록 허가하고, 자원(自願)하는 서책(書冊)을 가지고 회사(回賜)할 것이니, 그것을 관청·민간 및 사사(寺社)에 널리 효유(曉諭)하라. 하였다.

<예종 1년 9월 18일(무술)> 예조(禮曹)에 전교하기를,
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 지공기(志公記), 표훈천사(表訓天詞), 삼성밀기(三聖密記), 도증기(道證記), 지이성모하사량훈(智異聖母河沙良訓), 문태(文泰)·옥거인(玉居仁)·설업(薛業) 세 사람의 기(記) 1백여 권과 호중록(壺中錄), 지화록(地華錄), 명경수(明鏡數) 및 모든 천문(天文)·지리(地理)·음양(陰陽)에 관계되는 서적들을 집에 간수하고 있는 자는, 경중(京中)에서는 10월 그믐날까지 한정하여 승정원(承政院)에 바치고, 외방(外方)에서는 가까운 도(道)는 11월 그믐날까지, 먼 도(道)는 12월 그믐날까지 거주하는 고을에 바치라. 바친 자는 2품계를 높여 주되, 받기를 원하는 자 및 공사 천구(公私賤口)에게는 면포(綿布) 50필(匹)를 상주며, 숨기고 바치지 않는 자는 다른 사람의 진고(陳告)를 받아들여 진고한 자에게 위의 항목에 따라 논상(論賞)하고, 숨긴 자는 참형(斬刑)에 처한다. 그것을 중외(中外)에 속히 유시하라.” 하였다.

<성종 원년 12월 9일(무오)> 교서(敎書)를 내리기를,
“전일에 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 지공기(志公記), 표훈천사(表訓天詞), 삼성밀기(三聖密記), 도증기(道證記), 지리성모(智異聖母), 하소량훈(河少良訓), 문태(文泰)·왕거인(王居仁)·설업(薛業) 삼인기(三人記) 1백여 권과, 호중록(壺中錄), 지화록(地華錄),  명경수(明鏡數)와 무릇 천문(天文)·지리(地理)·음양(陰陽) 등 여러 서책(書冊)을 빠짐없이 찾아내어 서울로 올려 보낼 일을 이미 하유(下諭)했으니, 상항(上項) 명경수(明鏡數) 이상의 9책과 태일금경식(太一金鏡式), 도선참기(道銑讖記), 는 전일의 하유(下諭)에 의거하여 서울로 올려 보내고, 나머지 책은 다시 수납(收納)하지 말도록 하고, 그 이미 수납(收納)한 것은 돌려주도록 하라.” 하였다.


 이상과 같이 끊임없이 조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하여 조선의 왕들은 고대사 관련 자료들을 찾았고, 이를 보존하려 했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많았던 역사서들이 지금은 남아있지 못하다.

 

그나마 있는 것들도 제도권 역사학자들에 의해서 위조된 책으로 치부되어 공교육에서 가르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막말로 그들 말처럼 위조된 책이라 해도 그것이 민족의 정신을 되살리고, 자긍심을 줄 수 있다면, 역사 창작물로라도 소개를 해야할 것이다.


 초대 문교부장관을 지내신 안호상 박사는 “동이사상”에 대한 글에서 우리나라 역사학자들이 상고사자료가 부족하다고 말하면서 그나마 있는 자료들을 검토조차 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역사학자들 100명을 모아놓고 사서삼경을 읽은 사람을 찾아보면 겨우 한 두명 정도 밖에 없으니, 역사연구를 할 수 없고, 고작 보는 책이 조선총독부에서 편찬해놓은 25권의 <조선사>정도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나라 사학 현실이 이 지경에 처해 있으니, 삼황오제로부터 진시황까지 기록되어 있는 <고기(古記)>라는 책에 환인과 환웅과 함께 태호 복희씨, 공자, 맹자가 모두 동이족이라는 사실들이 중국역사로 편입되거나 신화로 둔갑해버린 것이다.

 

결국 조선시대까지는 중국에 의해서, 일제 때 일본에 의해서, 해방 후 지금까지는 서양에 의해서 우리의 역사가 마비되어 환자가 되어 버렸다고 한다.       

 이상과 같이 1만년 이라는 장대한 역사를 담은 역사서를 한 사람이 연구하고 정리한다는 것이 일생을 다 바친다고 해도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더욱이 온전한 것이 남아 있지 못하고 불순물이 많고, 조각난 역사책들을 하나로 꿰어 맞춘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다만 지금까지 보존되어 내려온 것들을 통째로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이 나온다면 입체적으로 설명해낼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우리 역사는 부분적인 설명이 아니라 전체적인 조명이 필요한 시기이다.

 

먼저 왜곡된 역사의 옳고 그름을 분명하게 해야 하고, 그 다음으로는 옳은 것들만을 하나로 묶어내야만 한다. 그러기위해서는 방대한 분량의 도서와 자료들을 수집하고 해석하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이 나와 주어야 한다.

 

따라서 어릴 대부터 역사에 관심을 가진 어린이들이 많이 나와 열심히 역사서를 읽어 준다면 머지않아 우리 역사도 바르게 정립되리라 확신한다.

Posted by 박평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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