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운'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11.09.29 가례보감(권오운 님)

가례보감(권오운 님)

▶ 우리집 가계도

본관

본관

안동권씨

검교공파 35세

안동김씨

감찰공파 29세

아버지

어머니

아버지

어머니

권영식

임계희

김재동

서선희

본인의 형제

본인

아내

아내의 형제

권오창

권오종

권오운

김영옥

김영순

김광현

김대현

김석현

김승현

조카

자녀

조카

권기동, 권기원

권기범, 권기훈

권기성, 권기현

권숙현, 권계현

권기호

권기성(홍민섭)

권기문(미 혼)

권정연(전상희)

김미연, 김도연

김주연, 김도원

김정인, 김민경

김창년, 김민진

김홍미, 김성년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

할아버지는 서당 훈장, 요새 말로 하면 한문을 가르치는 선생님으로 동네 아이들에게 한문과 붓글씨를 가르치셨으며, 나는 천자문과 서예, 바둑, 장기 등을 할아버지한테서 배웠다. 할아버지께서는 토정비결을 잘 보시기로 소문이 나서 정월초순경에는 할아버지를 찾아오시는 손님들이 많았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버지에 대한 기억>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총명하셔서 32세의 나이로 최연소 안정면 면장이 되셨고, 항상 청렴한 공무원이 되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살아오신 분이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인데 안정면장실에 찾아가면 공책을 펼쳐보시면서 칭찬도 해주시고, 연필도 손수 깎아주실 만큼 다정다감한 분이셨다. 특히 한시를 잘 쓰셨으며, 한시백일장에 나가서 상을 타 오시면 모두 손자손녀들에게 나누어주거나 선물을 사주셨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강직한 선비다운 풍모를 지니셨다. 자식들이 찾아뵐 때는 언제나 마루에서 인사를 드리고 방으로 들어가야 할 만큼 예절을 중요하게 여기셨다. 93세의 나이로 돌아가실 때까지 청소년교육과 문학 활동을 게을리 하지 않으신 멋진 아버지셨다.


<부모님과 함께 찍은 사진>

<나의 인생이야기>

나의 고향은 강원도와 충청북도의 경계선이 맞물린 경상북도 영주시이다. 백두대간의 허리부분인 소백산 아래 죽령제가 바라보이는 줄포리에서 태어났다. 낙동강 상류가 유리알처럼 투명했던 개천에서 자연과 벗하여 뛰놀며 안정초등학교와 영주 영광중·고등학교를 졸업 했다. 그 후 청운의 꿈을 안고 서울로 올라와 건국대학교를 거쳐 동 대학원 석사과정을 졸한 후 대를 이은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노동부(노동청)와 선거관리위원회에 적을 두고 전국을 보헤미안처럼 떠돌다가 2005년 12월말에 공직생활 33년을 마감하고 나서 잠시 서울시의회 정책 연구 위원회 위원으로 있다가, 현재는 사단법인 바른선거시민모임중앙회 회장으로 시민단체 활동을 하고 있다.


<나의 어린 시절 사진>

내가 5살 때 6.25전쟁 중 GMC 트럭에 치였습니다. 그러니깐 오전 10시30~11시경에 불의의 교통사고로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으나 의사가 사망판정을 내려 어머니께서 등에 업고 영주에서 약 8km 떨어진 안정면으로 오던 중 약 300m쯤 올 무렵 엄마 물 줘 소리에 깜짝 놀라 땅바닥에 앉혀보니 여러 차례 “엄마 물 줘” 라고 겨우 말을 했다고 한다. 다시 급히 병원으로 가서 겨우 치료를 받고 살아났다. 머리와 오른쪽 다리에는 그 때 다친 흉터가 아직도 남아 있다.

어린 시절 고향에서 개구쟁이 동무들과 수수께끼놀이를 하던 그 시절이 마치 엊그제 일 같은데 내가 어느새 육십 줄 중반을 넘어섰다. 생각해 보면 앞으로 내가 살아갈 날이 지금까지 내가 살아 온 날들에 비해 너무나 짧다. 마치 서산을 향해 넘어가는 해와 같은 느낌이다. 이쯤에서 헉헉거리며 걷던 걸음 속도를 줄이면서, 굽이굽이 걸어 온 내 인생행로의 발자취를 뒤돌아보니, 강물처럼 흘러 가 버린 그때 그 순간들이 너무 그립다.

봄이 오면 동네 아이들과 함께 뒷산에 올라가 참꽃을 따먹고 여름이면 앞 고랑에 나가 붕어, 피리 잡고, 밀서리, 콩서리하며 생각만 해도 침이 꿀꺽 나오는 추억이 이제는 그립다. 가을에는 뒤뜰의 감나무에 감이 빨갛게 익어가고, 넓은 안정들녘에 나락이 누렇게 익어갈 무렵 댓병이나 광목자루에 메뚜기를 가득가득 잡던 기억들. 겨울이면 군불 지필 나무를 하러 산에 가고, 온 산에 눈이 수북수북 쌓이면 동네 아이들과 떼를 지어 토끼몰이를 하던 옛 추억들. 이제는 한 폭의 동양화처럼 아름다운 추억의 앨범으로 내 가슴 깊이 간직되어 있다.

<결혼식 사진>

나의 결혼은 중매로 1977년 1월 21일 봉화군 춘양처자 김영옥과 청량리역 근처에서 선을 봤다. 선을 보는데 눈이 아름답고 시골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첫 만난의 장소로는 건국대 ‘일감호’를 한 바퀴 돌았다. 그 후 종로, 인천 등 여러 번 만남을 통해 본 결과 아주 순수함에 반해버렸다. 그리하여 2월 13일 청량리 한일관에서 양가의 친척을 모신 자리에서 약혼을 하였다. 그 후 3월 12일 안갑준 주례선생님을 모시고 결혼식을 올렸다. 신접 살림집을 종로구 가회동 1-154번지 한옥집 전세를 얻어 신혼생활이 시작되었다. 직장이 종로구 수운회관 건물 내에 있었기 때문에 도보로 약 10~15분 거리로 근무환경이 좋았다. 아침 일찍 일어나 삼청동에 있는 삼청공원 산책과 운동, 새벽에 파는 순두부를 자주 사먹고는 했는데 그 구수한 맛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장인 장모님과 함께 찍은 사진>

그 이후로 동대문구 면목동에 단독주택(33평)을 마련하여 이사 후 78년 2월 16일 맏딸 기정이가 서울 위생병원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다시 성동구 자양동으로 이사를 하였다. 여기서 79년 10월 25일 5시경 건대부속 민중병원에서 아들 기문이가 태어났다. 그리고 막내딸 정연이가 81년 9월 15일 19시경 건대부속 민중병원에서 태어났다.

<우리 집의 가훈은>

至誠이면 感天이다. 至誠이면 感天이라는 이 말은 정성이 지극하면 하늘도 감동한다.라는 뜻으로서 사람이 무슨 일이든지 정성을 다하여 하면 하늘이 감동하여 일이 순조롭게 풀리어 좋은 결과를 얻는다는 참 좋은 말이다. 오래전 아버지께서 붓글씨로 써 주신 至誠感天을 액자로 만들어서 거실에 걸어놓았다.

<좌우명>

항상 내 마음 속에서는 “재물 부자”는 못되어도 ‘웃음부자’는 되어야겠다는 생각에서 가급적 웃으면서 살아보려 애썼다. 가정에서도 그랬고, 직장에서도 그랬고, 친구들에게, 그리고 주변 이웃들에게도 언제나 내가 먼저 웃으면 상대도 웃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웃으면서 세상을 살아왔다.

그리고 모든 인맥은 성공의 길이요. 금맥의 산을 이룬다. 현실에 충실하고 미래를 예측하여 거기에 맞는 실력과 능력을 쌓아 열심히 노력하는 희망이 넘치는 미래 지향적인 사람이 진정한 황금산의 주인이 되리라 믿는다. 

<인생극장>

나는 지방선거를 염두에 두고 공무원 명예퇴직을 선택했다. 부이사관으로 승진하여 홍조근정훈장도 받았지만, 모든 일에는 때가 있듯이 지방선거 출마를 위해 마음의 다짐을 하고, 지방선거 출마선언을 위해서 가족회의를 열었다.

“오늘 모처럼 온 가족이 모인 까닭은 지방선거 출마에 대한 나의 소견을 말하고 진솔한 의견들을 듣기 위함이다. 선거는 1등만 있지 2등이 없다. 나는 공무원 출신에 선거업무를 잘 알고 있어 여러 가지 면에서 여건은 좋은 편이나 선거에 출마 하자면 밀어 줄 사람과 돈이 우선되어야 한다. 사람은 제일 먼저 친척, 학교동창 선・후배, 고향 선・후배 직장 선・후배 아파트 주민 등등을 조직화 하고 그 조직을 통하여 돈은 최소의 비용으로 쓰면 된다. 선거관리위원회 출신 공무원으로 바르고 깨끗한 모범적인 선거를 보여 주겠다.”고 선언하고, 가족들의 동의를 얻고자 하였다.

예상한 바지만 아내가 제일 먼저 하는 말 당신이 정치를 아세요, 남다르게 똑똑하기를 합니까? 출마하면 밀어 줄 사람도 없고, 또 돈이 어디 있습니까? 일찌감치 마음 비우세요.

이에 동조하여 맏딸 기정이도 한마디 거든다.

아빠 출마하지 말고 조용히 사세요.

아들 기문이는 아빠가 하시는 일이니까 아빠가 결정하세요.

여러 가지 말로 가족들을 설득하였으나, 아내와 맏딸은 더욱 더 강경하게 반대하는 것이다. 그러나 쉽게 포기 하기란 어려웠다. 많은 갈등과 고민 속에 시간은 흘러 지방선거 일만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평소 나를 신뢰하고 계신 세명대학교 권영우 이사장님을 찾아 전농동 집으로 갔다.

권 이사장님은 대뜸 물으신다. 요즈음 뭐 하나?

놀고 있습니다.

뭐라도 해야지, 연금은 얼마나 받나

200만원 정도 받고 있습니다.

그것 받아서 생활이 되겠나, 뭘 하긴 해야겠구나!

네. 이번 지방선거에 출마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선관위 국장 했다고 선거를 쉽게 보는 모양인데, 큰코다친다.

내가 선거를 많이 치러 보았지만 정말 못할 짓이었다.

그리고 자네는 돈도 없잖아! 얼마 안 되는 퇴직금 날리지 말고, 형제간 친척 간, 가까운 사람들한테 돈 구걸하지 말고 조용히 살아, 그러니까 출마하지 말게. 알았지?

그리고 대학 강의 나가고 하면 삼사백 만원이면 잘살 수 있잖아, 그렇게 해. 선거는 남모르는 돈이 엄청나게 들어간다는 것 잘 모르지?

선관위 국장이라 선거에 대해 겉만 알지 속사정은 모르잖아. 공무원 생활하면서 깨끗하게 살아 왔는데 더러운 진흙탕 같은 정치 밑바닥에 왜 들어가려고 하느냐. 내말 명심해 들어. 알았지?

너무도 진지한 충고와 함께 문득 뇌리 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가족들의 얼굴들 특히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렇게 출마의 뜻을 접고 전농동 집을 나섰다.

<가족사진>

<가족박물관>

아우의 명예퇴임을 축하하면서

맏형 권 오 창

유수 같은 세월은 말없이 흘러갔구나! 벌써 명예퇴임을 앞두고 있다니 여러 가지로 지난날의 아쉬움을 금할 길 없다.

돌이켜 보건데, 어린 시절 넉넉하지 못한 가정에서 수학(修學)의 길에 고생도 많았고 어려울 때마다 자신이 스스로 하나하나 헤쳐 나간 것만으로도 장한 일이었다.

공직에 몸담으면서 때로는 가족과 떨어져서 지방에 근무할 때도 있었으며 공무수행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소관업무발전을 위하여 오로지 공무에만 정진하여 타(他)의 본이 되었음을 칭찬하는 바이다.

그리고 우리 형제들도 모두 공직생활이라는 범위 안에서 아무런 허물없이 봉직할 수 있었다는 것은 국가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행운이 있었음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것을 미루어 볼 때에 일찍이 우리 조부님께서는 한말(韓末)의 풍운을 헤치면서 누구보다도 앞서서 시대 흐름을 깨닫고 개화된 일본국(日本國)을 다녀오시면서 독자(獨子)이신 아버님을 신문화(新文化)에 접(接)할 수 있게 수학에 정진(精進)할 수 있도록 하여 주신 덕분에 우리 3형제도 그 뜻을 이어받아 오늘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사람이 평생을 살아가자면 영욕(榮辱)이 반반(半半)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지나온 과거는 어려운 고비도 많았다고 생각하고 한때에는 광영(光榮)의 자리에 머물렀다고 생각된다.

특히 6・25라는 전란은 많은 시련과 재난이 대동지환(大同之患)으로 다가왔으나 우리 가정에는 큰 피해가 없었음을 만행으로 여기고 항상 선조(先祖)님들이 주위에 베푼 은덕과 자손들에게 가르침이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자부심을 가져도 되리라고 본다.

그러므로 조선(祖先)을 받드는 일과 자손(子孫)을 경계(警戒)하는 일을 꾸준히 하여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일들은 올바른 삶을 살아가도록 우리가정에서는 일찍이 가훈(家訓)으로 경계하고 있다. 우리가정의 가훈은 인자무적(仁者無敵)이라는 함축된 행동실천 표현이 있으나, 조부님께서는 늘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라는 말씀을 하셨고 감나무 밑에서 감이 떨어지기를 바라지 말고 삿갓이라도 깔데기를 하여 기다려야 한다고 말씀하셨고 조모님께서는 악인(惡人)을 선대(善待)하라 하셨으며 아버님께서는 사물을 보고 판단하는 데는 달관(達觀)하여야 한다.라고 말씀하셨고, 어머님께서는 늘 좋은 것이 좋으며, 형제간에 우애가 없으면 남만 못하다. 라는 말씀을 하셨다.

이러한 생활의 지표(指標)를 가지고 자손들을 육영(育英)하고 성가(成家)시키고 가정교육을 하여 온 덕으로 우리집안은 평안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이러한 우리가정의 삶의 지침(指針)대로 이웃과 더 불어 함께 살아간다면 국가 사회에 간접적인 기여와 공헌을 할 수 있다고 굳게 믿는다.

끝으로 아무쪼록 건강한 가운데서 화목한 가정생활과 뜻있는 취미활동과 더불어 여력이 있다면 더욱 남을 위하여 봉사하는 자세로 생활하기를 간곡히 바라면서 다시 한 번 영광스러운 명예퇴임을 축하하고 이만 필(筆)을 놓는다.

풍류객(風流客) 권오운에게

이홍근

건국대학교 제20회 행정학과 동문, 세대산전(주) 대표이사

山水가 아름다운

선비의 고장에서 태어나

心志가 맑고

풍류를 즐긴다.

간혹 詩心이 떠오르며

홀로 微笑짓듯

權兄을 생각하면

董心의 鄕愁가 스친다

學窓時節에는 科 代表

졸업 후에는 行政學科 동기회 결성

졸업한 지 35년이 지난 오늘 40여년의 희로애락이 녹아있다.

선술집에서는 투숙한 사투리로 분위기를 띄우고

토론에서는

정연한 논리로 좌중을 모은다

일 앞에서는

좋고 궂은일 가리지 않고

기꺼이 나서는

그는 일꾼이다.

혼사 주례 쉽지 않을 텐데

주례 선생님으로 인기가 좋아

많게는 하루에 세차례

일년에 백여건의 주례를 맡는다

친구 아내 병 치료에 약이 된다고 하여

공직자로서는 어려운 일

수소문하여 구하여 와

소문 안 나게 치료 당부하고

상식의 기준 앞에서는

위험한 모험도 서슴치 않는

그는

통 큰 사람

바쁜 세상에

그리고 바쁘지 않게야 마는

자기일 제쳐두고

친구 사정 들어주는

이-히영!

다정하고 여유롭게 불러준다

스스로 자신의 영역을 넓혀 온 길

송인호

영광고등학교 제8회 동기, 영주 영광고등학교 교장

먼저 권오운 국장님의 명예퇴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백두대간의 중심에 우뚝 솟은 소백산 아래서 어린 시절을 보낸 권 국장은 나와는 지역에서 학창시절을 같이 보낸 죽마고우이다. 고향에서 안정면장을 지내신 부친의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고 성장한 그는 학창시절에는 얼분이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어른스럽고 대견스러웠다. 어린 나이에 걸맞지 않게 의연함이 배어 있는 것으로 보아 가정교육의 영향인 것이 분명한 것 같았다.

고향을 떠나 공직에 몸을 담은 권 국장이 우리 나라 선거업무의 일익을 담당해왔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

우리의 근현대사를 되돌아 보대 장기독재로 점철된 시련의 시대였다고 볼 수 있다. 그로인해 억압과 어둠의 시대가 우리 사회의 분위기를 압도해온 것이 사실이다. 이처럼 권력자들의 장기집권의 이면에는 그것을 보장하는 부정하고 타락한 선거가 자리 잡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와중에서도 한 가닥 민주화의 불씨를 피워온 것은 선거관리위원회라는 독립된 헌법기관의 역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본다. 더구나 권 국장이 우리나라의 정치1번지라는 서울지역구에서 선거업무를 총괄해왔다는 것은 더더욱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지기로서 교육계에 몸담아 온 입장에서 본다면 권 국장의 삶은 새삼스럽고 자랑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사실 과거 유년시절에 우리 지역만 해도 사회가 혼란하기 그지없었고 지도자들은 권력에만 눈이 멀어 희망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시기였다. 그러한 와중에도 우리들은 그저 배워야한다는 일념으로 대처해 나가서 학업에 매달렸다. 그 동안 우리들이 보아왔던 어둡고 칙칙한 분위기를 걷어내야 한다는 일종의 소명감 같은 것이 우리들 가슴에 배어 있었던 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격동의 시기인 30여 년을 공직에 몸을 담아왔다. 권 국장은 국가의 기틀을 세우는 선거업무에 충실했고 나는 교육계에 평생을 바쳐왔다. 물론 그 동안 부족한 부분도 많았지만 이제는 나름대로 국가를 위해 봉사해왔다고 자부해본다.

특별히 권 국장은 자유민주주의의 보루를 지키는 선거관리업무의 일선에서 우리나라 민주 권력창출을 위해 헌신해 왔다는 점에서 동향친구의 한 사람으로서 무한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그리고 같이 살아온 동료이자 같은 시대를 살아온 사람으로서 그의 삶은 다른 사람에게 인생의 의미를 생각하는 데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의 삶의 역정은 바로 물과 같다고 볼 수 있다.

일찍이 공자는 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역설했다. 단단한 돌이나 쇠는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깨지기 쉽다. 그러나 물은 아무리 높은 곳에서 떨어져도 깨지는 법이 없다. 물은 모든 것에 대해서 부드럽고 연한 까닭이다. 저 골짜기에 흐르는 물을 보라. 그의 앞에 있는 모든 장애물에 대해서 스스로 굽히고 적응함으로써 줄기차게 흘러, 드디어는 바다에 이른다. 적응하는 힘이 지혜로워야 사람도 그가 부닥친 운명에 굳세다.

세월은 본래 길건만 바쁜 자는 스스로 줄이고, 천지는 본래 넓건만 천한 자는 스스로 좁히며, 바람과 꽃과 눈과 달은 본래 한가한 것이건만 악착같은 자는 스스로 분주하다고 하는 선현의 말처럼 그의 삶은 스스로 자신의 영역을 넓혀 온 것임에 틀림없다.

그런 점에서 권오운 국장은 분명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온 것이다. 그리고 남은 그의 삶도 그 여세를 몰아서 더욱 더 빛나는 삶의 모습을 기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시 한 번 영예로운 퇴임을 축하하며 앞날에 하나님의 가호가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자서전 “웃음부자”의 서문

건국대 석좌교수 김홍신

곧은 선비정신과 막대한 장수기질을 고스란히 간직한 양반 권오운선생은 그 큰 가슴을 여미고 스스로 촌사람이라는 자부심을 드러내어 참 고맙다. 애향심과 지역감정은 명백하게 다르다. 자기이익을 전제로 하면 지역감정이지만 내가 태어난 곳과 나를 태어나게 해 준 사람과 내가 자라는 과정에서 나를 살펴준 사람들에게 사랑을 되돌려주려고 하는 것은 애향심이다. 권선생은 그들과 더불어 살아가려고 하는 향기가 스며있어 멋스럽다.

오랜 공직생활을 했음에도 겸손하고 늘 다사로운 미소와 눈길로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의 넉넉한 마음은 우리들에게 기쁨이 되었고, 좌우를 보듬은 가슴에서 큰 사람임을 느끼게 해주었다. 33년 동안 국가와 국민에게 봉사하며 틈틈이 글을 쓸 만큼 내면을 가다듬은 정성은 사람과 사물을 지극히 아끼고 사랑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에게서 정겨운 향기를 느끼는건 언제나 변함없는 사람냄새이다.

부모 섬김도 남다르고 자녀에 대한 사랑도 지극하여 아내에 대한 속정도 그윽해서 참 좋다. 친지들에 대한 뜨거운 시선도 우리들 가슴을 따스하게 해주곤 한다. 그래서 참 미덥다.

그는 자신의 인생나침판으로 자신의 길을 당당하게 걸어왔기에 오늘 우리들 가슴에 꽃다발을 던져주는 것이다. 남은 인생도 정진하여 우리들의 기쁨이 되기 바란다.

<후손들에게 남기는 소망편지>

우리 가족들의 모습을 연상하며 특히 너희들 3남매의 얼굴을 영상화 하며 어릴 때부터 지금 성인이 된 모습을 그리며 이 글을 쓴다.

너희들은 지난날을 반성하며 오늘을 더 즐겁고 아름답게 보람을 느끼며 살아가야 하며, 먼 미래를 꿈꾸며 큰 그림을 그려야 하리라 믿는다.

너희들은 무슨 꿈을 꾸며 어떤 인생의 목표를 향해 정진하느냐?

나는 아버지로서, 인생살이의 선배로서, 너희들이 잘 살아가고 잘 되기만을 평생 동안 희망하며 살아가고 있단다. 아버지, 우리가 알아서 할게요. 하면서 나에게 부담주지 않으려는 너희들의 깊은 마음이 나를 무척이나 든든하고 기쁘게 하지만 한편으로는 급변하는 세상에서 지혜롭고 현명하게 살아가도록 경험사례나 조언을 충분히 할 수 없었던 아버지로써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이 앞서는 구나! 그래서 이제라도 글로써 몇 가지 당부하고 싶단다.

첫째, 실력이 제일이다. 언제 어디서든 실력이 있어야 능력을 인정받으니 실력을 쌓는데 게을리 하지 마라.

둘째, 인간관계이다. 가정의 화목, 즐겁고, 재미있는 직장생활, 선・후배의 끈끈한 정 등으로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사람 대 사람의 만남이다. 대인 관계를 잘해야 서로 돕고 주고받고 좋은 인상을 남겨 상대방에게 좋은 이미지가 심어져야 한다.

셋째, 돈 관리를 잘해야 한다. 자본주의 국가에서 돈은 매우 중요하다. 돈을 많이 가진다는 것은 권력을 가진 것이나 똑같다. 그래서 사용하는 방법에 따라 매우 위험할 수도 있고, 매우 유익할 수도 있다.

넷째,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사소한 것부터 시작하여 큰일에 이르기까지 행동 하나하나에 신경을 써야 한다. 항상 먼저 생각하고 행동에 옮겨야 후회가 없다.

다섯째, 건강관리다. 돈도 명예도 사랑도 건강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모두 소용이 없다. 기본 중의 기본이니 일찍 일어나서 운동해라. 튼튼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이 자란다.

여섯째, 한 가지를 말하면 열 가지를 알아들을 수 있는 지식인 사회인이 되기를 기원한다.

이상과 같이 여섯 가지의 소망을 적었으니 깊이 생각하고 앞으로 생활하는데 지침으로 삼기 바란다. <2005년 10월 3일 서울 장안동에서>

Posted by 박평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