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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10.07 가례보감(단가옥 님)

에게 두 번째 생명을 주신 아버지!

어릴 때부터 친척이나 이웃이나 항상 저를 보고“ 얘야, 넌 너의 아버지한데 꼭 효도를 하거라. 아버지 너 때문에 고생을 많이 하셨단다, 그리고 너 아버지 아니었으면 너 아마 지금까지 이 세상에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처음에 그런 말씀을 듣고 정말로 이해가 안 되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초등학생이 되어서야 할머니한데서 나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1977년 중국 동북쪽에 흑룡강성(黑龍江省))의 한 작은 마을에 태어났다.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약한 나는 항상 아팠다고 한다. 3살 된 무렵에 갑자기 오른팔 윗부분이 아프기 시작했고, 제대로 말을 못한 나는 항상 짜증을 부리며, 신경질적으로 울기만 했다는 것이다. 어머니께서는 내가 떼를 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버지께서는 나의 이상한 행동에 세심한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셨다고 한다. 어느 날 내 오른팔을 자세히 바라다보니, 작은 종양이 하나가 작고 하얗게 튀어 나온 것을 발견했으나 만져 보니 딱딱하기도 하고, 금방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점점이 아픔이 심해져 밤새도록 아파서 잠을 못 잘 지경이 됐다고 한다.

마침내 얼마 안 돼서 그 종양이 터져서 피부 속에서 노란 액체가 흘러나오기도 하고, 종양의 수가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한 개였는데, 일곱 개 까지 펴지게 되니 아버지께서는 겁이 나서 아직 어린 나를 여기저기 병원에 다녀봤지만 무슨 병인지 알지 못해서 진단을 받지도 못하고 당연히 치료도 못했다고 한다.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치료할만한 곳을 찾아 하얼빈까지 먼 길을 나섰다. 처음으로 기차를 타는 나는 무척 신기해서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아버지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 찼었다. 하얼빈에 도착하자마자, 제1병원을 찾아갔다. 2주후에 결과가 나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버지께서 쓰러질 뻔 하셨다.

의사선생님의 말씀대로 나는 아주 희귀한 병인 “을골수염(骨髓炎)을 앓고 있었다. 골수에 염증 있어서 피까지 독이 들어가기 때문에 생명을 위협할 수 있어서, 당장 오른팔을 절단수술 해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큰 벼락을 맞은 거 같았고, 한창동안 말씀을 하시지 못하셨다. ‘이 아이가 이제 3살인데 오른 팔을 절단하면 장애인이 될 텐데, 앞으로 어떻게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우리 딸을 장애인으로 만들 수 없다.’고 생각한 끝에 아버지는 미련 없이 수술 날짜 하루를 놔두고 나를 데리고 몰래 병원을 빠져 나왔다고 한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아버지는 막막해 하며, 집에 도착해서 사정이야기를 하고나니, 어머니께서는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기절하셨단다. 절단 수술을 하기는 싫지만, 생명까지 위협 할 수 있어서 수술 받기로 했지만 반면에 아버지께서 다른 방법이 있을 거라고 굳게 믿으시고, 다시 여기저기 분주하게 방법을 찾아다니셨다고 한다. 서양(西洋) 의학(醫學)에 좋은 방법이 없으면 중국의 전통의학인 중의(中醫)의 힘으로 해결해보자고 결심했던 것이 바로 나를 살려냈다고 한다. 누가 동쪽에 의사가 있다고 하면 바로 동쪽으로 가시고, 누가 서쪽에 의사가 있다고 하면 바로 서쪽으로 가시고, 몇 개월 지나는 데 투병생활이 좋아지지 않아 걱정이 태산이었다고 한다.

많은 힘과 노력과 비용 등 너무 부담이 돼서, 아버지께서는 허리가 휠 정도였고, 때마침 교장선생님으로 승진하게 된 아버지께서는 집안 일 하랴 학교일 하랴 너무나 바쁘게 보내다보니, 어머니께서는 포기할 생각까지 하면서도 미신을 전여 믿지 않았던 어머니는 집으로 무당을 초대해서 굿까지 하기도 했다. 당연히 아무 소용이 없었다.

마침내 지인의 소개로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때부터 외과 의사였던 방선생님을 만나게 됐다. 첫째 날에 방선생님은 나의 상황을 보고 거절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병이 아주 심해서 잘못하면 책임을 질 수 없는 일이 벌어진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께서는 사정하고 도 사정을 했지만, 좀처럼 방선생님은 승낙을 하지 않았으나, 아버지는 희망을 잃지 않으시고 딸을 살려야 한다고 조르고 또 졸랐다고 한다. 이튼 날에 다시 나를 데리고 방선생님을 뵈러 가서 무릎을 끊고 다시 간절히 애원했다고 한다. “이 아이가 이미 이런 상황이 되었으니, 선생님께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꼭 이 아이를 살려주세요. 선생님 시키는 대로 다 하겠습니다.” 이렇게 다짐하고 나서야 선생님은 마음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으나, 환자의 어려운 상태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선뜻 승낙을 하지 못하고, 사흘 나흘째 찾아뵈었을 때 드디어 선생님의 마음을 감동 시켜 승낙을 얻어냈다고 한다.

그러나 쉽게 치료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선생님은 아버지에게 신신 당부를 하기를 “하루 이틀 사이에 절대로 효과가 나타나지 않으니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합니다. 길면 3년, 빠르면 2년은 있어야 합니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탕약을 먹고, 아침 점심 저녁에 가루약을 먹고, 게다가 상처 있는 부위에 고약을 붙이고, 고약에 농액(膿液)이 묻으면 수시로 농액을 닦고 깨끗한 고약을 다시 갈아야 합니다.”라고 하시자, 마침내 아버지께서는 안도의 한 숨을 쉬었다고 하신다. 새로운 희망이 보였기 때문이다. 성격이 세심했던 아버지는 어머니도 못 믿고, 당신이 직접 나의 모든 일을 스스로 도맡았으며, 매일같이 약제 구하고. 가루약으로 빻고, 탕약제로 끓이고. 수시로 고약을 갈아 붙이는 등등 쉬지 않고 돌보셨다고 한다.

하루 종일 학교 일 때문에 이미 지쳐 버린 아버지께서는 그래도 나를 보면서 항상 웃으시면서 “우리 딸이 너무나 대견해 아픔도 꾹 참고, 역시 우리 딸이야!” “오늘 보니 어제보다 많이 좋아 졌네. 금방 나아 질 거야. 우리 딸 화이팅!” “약이 너무 맛이 없지 조금만 참아 금방 좋아 질 거야.” “오늘 보니 상처가 작아 졌네 조금만 더 힘내보자.” 내 앞에서 항상 웃는 얼굴 보여주지만 나도 모르게 아버지는 눈물을 많이 흘리셨다고 한다. 모든 정성을 다해서 나를 간호했고, 하루 이틀이 지나면서 정말로 몰라보게 좋아 지기 시작하자 아버지의 얼굴에서도 웃음꽃이 피기 시작했다.

예상보다 빠른 속도로 18개월 지나고, 나의 오른 팔이 완치됐다. 의사선생님도 이렇게 빨리 완치될 줄 몰랐다고 하시며, 많이 놀랐다고 한다. 치료는 끝나지만 우리와 방선생님의 인연은 끝나지 않았다. 명절마다, 아버지께서는 나를 데리고 방선생님을 찾아뵈었다. 그리고 나에게 항상 이런 말씀을 하셨다. “방선생님은 너만 아니라 우리 집안의 은인이시고. 언제라도 이 은혜를 절대로 잊으면 안 된다.” 방선생님은 환자를 많이 치료했지만 우리 아버지처럼 오랫동안 왕래한 환자는 없었다고 한다.

그 이후로 중국의 “구병성의(久病成醫)”라는 속담처럼 아버지도 의사가 되셨다. 그때부터 아버지는 중국의 전통의약에 관심을 가지고, 여가 시간에 항상 중의 책을 보면서 연구를 하셨다. 방선생님은 연세가 많아서 몸이 불편해지기 시작 하자 어느 날 아버지를 부르셨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중의 책, 고약 만드는 비법 등 하나도 남기지 않고 아버지에게 가르쳐주셨다. 자기 자식이 여섯 명이나 있지만 한명도 의학에 관심이 없고, 후계자로 삼을만한 사람이 없고, 여러 명 제자들이 있지만 성품이 좋지 않아서 믿을 수 없으므로 우리 아버지를 후계자로 삼기로 결심했다는 것이다. 이제 정식으로 의술을 배울 수 있어서 아버지는 무척 좋아 하셨다.

어느새 내가 수능 볼 시간이 됐었고, 무엇을 전공해야 할지 고민 중이었을 때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말씀을 하셨다. “너는 몸이 약하니까, 중의학을 전공하면 어때? 그리고 우리나라의 전통의학이 너를 살려줬으니 앞으로 너처럼 아픈 사람이 있으면 네가 그들은 살릴 수 있으면 참으로 기분 좋은 일이 아니겠니. 아버지 생각에 네가 중의학을 전공하면 좋겠다. 네 생각은 어때?”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나는 아버지의 뜻에 따랐다. 그러다가 나는 학교를 다니는 동안에 한국인 남편을 만났다. 처음에 한국인 남자친구와 사귀다고 말씀을 드렸을 때, 가족들은 심하게 반대를 했었다. 그러나 유일하게 아버지께서 나를 지지해 주셨다. “언제든지 무슨 일인지. 아버지는 항상 너의 편이다. 아버지는 널 믿어. 너의 선택을 존중한다, 잘 살도록 하라” 아버지의 말씀이 저에게 큰 힘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남편을 따라서 한국에 올 수 있었다. 지금 나는 의사가 될 수 없지만, 만약 그때 아버지의 뜻을 따르지 않았다면 지금의 남편하고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당연히 한국에 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낳아 주시고, 내가 인생의 첫 고개를 무사히 넘을 수 있게 해주셨다. 내가 고민할 때, 내가 방황할 때, 항상 나의 든든한 언덕이 되어 주셨다. 나는 나에게 두 번째 생명을 주신 아버지를 사랑한다. 영원히!

Posted by 박평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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